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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200년 전 위대한 구법 여행을 떠났던 신라 고승 혜초

by 언덕에서 2012. 2. 9.

 

 

 

 

신라 고승 혜초 (慧超.704.성덕왕 3∼787.2.13.원성왕 3)

 

 

 

혜초의 왕오천축국 순례 판각화.

 

신라 23대 법흥왕 때 고승. 석가모니가 남긴 발자취를 살피기 위해 인디아 성지를 돌고 당 나라에 돌아와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쓴 인디아 기행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유명하다.

 723년(성덕왕 22) 당나라 광저우에 가서 인도의 승려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된 뒤, 그의 권유로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 불교 성적(聖跡)을 순례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龜玆)를 거쳐 733년 당나라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의 도량(道場)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 경전(密敎經典) 경전을 연구하였다.

 그가 당나라에서 천축국으로 이동하여 되돌아온 경로는 출발시 배편을 이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로 유명한 당나라 고승 현장의 인도 여행 경로와 일치한다.

 

 

 

혜초의 모습은 박진호 씨 작품.

 

 740년(효성왕 5)부터 이 경전의 한역에 착수, 이듬해 금강지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으나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不空三藏)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우타이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에서 발견되어 고대의 동서 교섭사(交涉史)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왕오천축국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혜초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의 돈황에서 혜초의 불교유적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908년 어느 날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는 중국 감숙성 돈황에 있는 천불동 제17 석굴을 탐사하던 중 동굴 천장 구석진 곳에서 낡고 오래된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했다. 무려 1,200년 동안 깊은 어둠 속에서 숨 죽이고 있던 보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던 순간이었다.

 가로 42cm, 세로 28.5cm의 황마지 9장을 이어붙인 두루마리에는 총 227행 5,893자의 한문이 손으로 적혀 있었다. 두루마리를 발견한 펠리오는 두루마리의 내용이 8세기 당나라 승려 혜림이 지은 불교어휘사전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제100권에 실려 있는 「혜초왕오천축국전」 편에 주석된 어휘와 일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원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상 중 하의 3권이었기 때문에 『일체경음의』 「혜초왕오천축국전」도 상중하의 권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3권 중 2권이 발견되어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설명된 85개의 단어가 필사본에 모두 나타나지는 않고 17개 만 나타난다. 이를 통해서 원본의 앞뒤 많은 부분이 두루마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런 점에서 필사 두루마리는 3권으로 된 원본의 전체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오천축국전』은 1,200년 전 ‘100명이 떠나도 돌아오는 이는 하나도 없다.’는 멀고도 험난한 천축으로 구법 여행을 떠났던 신라의 혜초 스님이 남긴 여행기록이다. 즉,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아랍 등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하면서 당시의 사회상, 정치, 종교, 경제, 풍습 등 문화에 관한 사실적인 기술을 담은 견문록이다.

 

 

 

혜초의 인도 순례도

 

 

당나라 현장의 인도 순례 루트. 혜초나 현장 공히 같은 루트로 당나라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700년을 전후하여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그 후 금강지의 권유로 구법여행에 나서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로 추정된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을 연구했다. 740년 1월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그 후 773년경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금강지의 제자 불공(不空)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유서에서 자신의 법을 이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의 장례 때 보여준 은혜에 감사하며 아울러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 뒤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오천축국전〉 3권 가운데 일부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序〉 및 〈하옥녀담기우표 賀玉女潭祈雨表〉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