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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 신재효

by 언덕에서 2011. 12. 13.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 신재효(申在孝.1812.순조 12∼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ㆍ개작자ㆍ후원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그의 가계(家系)는 본래 경기도 고양(高陽)이었으나, 서울에서 경주인(京主人)을 지내던 아버지 광흡(光洽)이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경영하면서부터 고창에 살게 되었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철종 때 고창현감이던 이익상(李益相) 밑에서 이방으로 일하다가 호장(戶長)에 올랐다. 1,000석을 추수할 정도의 부호였던 그는 1876년(고종 13년) 흉년에 구휼미를 내어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 품계를 받았다.

 향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고창지방 관청에서 열렸던 잔치에 판소리 광대를 포함한 각종 연예인들을 동원했던 경험과 자신의 넉넉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판소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판소리 광대들의 후원 및 이론적 지도자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동편제(東便制)의 명창 김세종(金世宗)이 소리 선생으로 초빙되어 판소리 전문교육을 도왔다. 이날치(李捺致)ㆍ박만순(朴萬順)ㆍ전해종(全海宗)ㆍ정창업(丁昌業)ㆍ김창록(金昌祿) 같은 명창들이 그의 지원과 이론적 지도를 받았다. 그밖에 진채선(陣彩仙)ㆍ허금파(許錦波)와 같은 최초의 여류 명창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는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동편제와, 잔가락이 많고 박자의 변화가 많은 서편제(西便制)에서 각기 장점을 취해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다. <광대가(廣大歌)>에서 판소리 사설과 창곡, 창자의 인물됨과 연기능력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판소리 4대법례를 제시했다. 만년에는 향리직에서 물러나 판소리 12마당 가운데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6마당을 골라 그 사설을 개작, 정착시켰다. 이 같은 작업은 당시 광대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작품들을 일단 정리하고 후대에의 전승을 매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조선 후기 상하층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며 판소리 사설을 합리적·사실적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당대 하층민이 이룩한 발랄한 현실인식이 보수적 지향이 강한 유가적(儒家的) 합리주의에 의해 상당 부분 거세되었다는 한계를 함께 지닌다. 판소리 개작 외에도 <치산가(治産歌)><오섬가(烏蟾歌)><방아타령><갈처사 십보가(葛處士十步歌)> 등을 비롯해 허두가(虛頭歌) 30여 편을 지었다. 이들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오위장본(申五衛將本)>에 개작한 판소리 6마당과 함께 실려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하거리(下巨里)에 그를 기리는 유애비(遺愛碑)가 남아 있으며, 묘소는 고창읍 성두리(星斗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