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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by 언덕에서 2011. 11. 8.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1932.7.20∼2006.1.29)

 

 

 

 


비디오아티스트. 서울에서 태어나 1956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5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 졸업 후 독일 프라이부르크음악학교 수학, 독일 뮌헨대학교 수학, 1998년 미국 프랫인스티튜트(명예미술학박사).

 유럽과 미국을 떠돌며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미술집단,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테이프리코더와 피아노음악 공연(독일 뒤셀도르프, 1959), 피아노포르테 연구 공연(1960), 심플 공연(스위스 스톡홀름,1961), 뮤직일렉트로닉TV전(1963) 등 많은 공연과 전시회를 가졌다.

 1963년 독일 부퍼달 파르니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1969년 미국에서 샬롯데 무어맨(Sharlotte Moorman)과의 공연을 통해 비디오 아트를 예술 장르로 편입시킨 선구자라는 평을 들었다. 1977년 위성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하였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러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도시와 영상전(서울시립미술관, 1996), 교과서 미술전(예술의 전당ㆍ한가람미술관.1997), 독일 비디오조각전(예술의 전당ㆍ한가람미술관.1997), 97 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1997), 개인전(미국 국립미국미술관.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 전당 미술관.1998), 한국현대미술전-시간(호암갤러리.1998) 등 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1996년 10월 독일 [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에 들었고,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월간지 [캐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로 올랐다. 1998년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공로로 '98년도 교토상'을 수상하였고,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받았다. 금관문화훈장(2000) 수상.

 

【백남준의 삶과 예술세계】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는 1984년 전 세계에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전만 해도 국내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였다. 남들이 하지 않는 미친 짓과 기행을 일삼는 전위예술가 정도로 막연히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우주중계로 연결해 국내에 KBS TV로 그의 예술세계가 쏟아지자 백남준씨는 한순간에 천재적 아티스트로 강한 이미지를 심었다.

 1932년 7월20일 서울 서린동에서 태창방직을 경영하던 백낙승씨 막내아들로 태어난 백씨는 경기중고를 나와 일본 도쿄대에서 미학과 음악사, 미술사를 전공했으며 58년에는 독일에서 음악사를 공부한 뒤 전자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백씨가 예술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은 1959년 독일에서였다.

 한해 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존 케이지를 만난 그는 ‘존 케이지에 보는 헌정’라는 제목의 작품을 한 화랑에 전시했으며 이때 이를 지켜본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셉 보이스는 후일 그의 예술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63년에 열린 백씨의 첫 개인전이 유명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장치된 비디오’ 3대와 ‘장치된 TV’ 13대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 잡은 황소머리가 전시됐는데, 개막일에 조셉이 난데없이 도끼를 들어 나타나 전시중인 피아노 한대를 부숴버린 것. 백씨는 이후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1984년 인공위공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트 오웰'이 성공하면서 34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그는 고국 땅을 밟자마자 ‘예술은 사기’라고 폭탄선언을 했고, 이는 ‘무엇을 근거로 예술이 사기인가’라는 논란을 불러오며 문화예술계에 한 차례 파문을 일으켰다.

 이어 86아시안 게임 때 인공위성 프로젝트인 ‘바이바이 키플링’을 만들어냈던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인공위성쇼인 ‘세계는 하나’를 엮어내 각별한 조국애와 타고난 천재성을 과시했다. 세계적 명성을 구가한 그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의 영예를 차지함과 동시에 독일의 저명한 '카피탈'지가 선정한 현존최고 미술가 100명 중 다섯 번째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6년 호암예술상을 받고 올해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 일본 교토프라이즈를 수상한 것도 그의 위치를 잘 말해준다. 백씨는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내 인생 중 가장 인상 깊은 일은 예술가 친구와의 만남이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그 산물이다"고 지적하면서 무명일 때 만나 동지적 유대관계를 맺었던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를 꼽았다. 그러면서 외국에서 평가받은 후에야 알아주는 국내풍토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연보】

▲1932년 = 서울 출생. 경기중고 졸업 후 선재덕, 이건우로부터 음악 사사.

▲1956년 =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 미학미술사학과 졸업.

▲1958년 =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음악수업. 존 케이지 만남.

▲1962년 =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셉 조이즈, 조지 메키어너스 만남.

▲1963년 =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을 열어 비디오예술의 기원을 열음.

▲1964년 = 미국으로 건너감.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참가.

▲1969년 = 뉴욕 하워드 와이즈 화랑에서 열린 ‘창조적 매체로서의 TV전’ 참가.

▲1973년 = 비디오테이프 ‘글로벌그루브’ 제작.

▲1978년 = 프랑스 파리미술관에서 ‘백남준전’ 개최. 독일 뒤셀도르프 주립미술 아카데미 교수 임명.

▲1982년 =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전시회.

▲1984년 =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오웰’ 전세계 방영. 베니스 비엔날레 초대.

▲1986년 =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인공위성 프로젝트 ‘바이바이 키플링’.

▲1988년 = 서울올림픽에서 인공위성쇼 ‘세계는 하나’.

▲1989년 =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전.

▲1991년 = 스위스 취리히 현대미술관 ‘백남준 회고전’.

▲1993년 =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 수상.

▲1995년 =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백남준 95’ 전시회.

▲1996년 = 호암예술상 수상.

▲1999년 = 미국 마이애미 예술가상. 일본 교토프라이즈 수상.

▲2000년 =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

▲2001년 =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 등재

▲2004년 = 트병 후 첫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

▲2005년 = ‘광복60주년 기념 전시회-베를린에서 DMZ까지’ 참가(서울올림픽미술관)

▲2006년 - 1월 29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