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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기독교 장로. 농민운동가 김용기

by 언덕에서 2011. 9. 20.

 

 

기독교 장로. 농민운동가 김용기(金容基.1912∼1988.8.1)

 

 

 

 

 

 

기독교농민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 경기도 양주 출생. 1930년 광동학교(廣東學校) 졸업 후 1931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기독교농민운동의 뜻을 품고 귀국하였다.

 1938년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 ‘봉안 이상촌’을 만들어, 기독교사회주의 실현을 위하여 힘썼다. 이상촌에서는 공동생활형태를 취하면서 가축부업을 의무화하고, 협동조합ㆍ소비공매조합 등을 결성하여 농민의 권익을 도모하는 한편, 금주ㆍ금연, 관혼상제 간소화운동도 전개하였다.

 1942년 ‘고구마 12개월 저장방법’을 개발하여 농가소득에 기여하였다. 1944년 10월 용문산부근 농민들을 중심으로 농민동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공출(供出)과 징용ㆍ징병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할 때 여운형(呂運亨)도 참여하였다. 1946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교회(현 임마누엘수도원)와 농장을 건설하였고, 1950년 경기도 용인에 복음고등농민학교를, 1954년에는 광주에 가나안농장을 설립하였다.

 1962년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워 본격적인 기독교농촌지도자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73년 강원도 원주에 제2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였다.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이상적인 농촌사회건설과 지도자양성에 헌신한 공로로 1962년 제1회 향토문화공로상, 1966년 막사이사이상(사회공익 부문), 1973년 제1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 필리핀 세이비어대학에서 명예인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3월 농촌후계자양성을 위한 가나안농군사관학교를 설립,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복음사업과 아울러 농촌운동지도자를 배출하였다.

 1990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일가상(一家賞)을 제정하고, 매년 농민운동ㆍ협동조합운동 등 사회공익실현운동에 공로가 큰 사람에게 시상하고 있다.

【저서】<참 살길 여기 있다><가나안으로 가는 길><심은 대로 거두리라><이렇게 살 때가 아닌가><그분의 말씀따라><조국이여 안심하라><나의 한길 60년><영광된 내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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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운동가 김용기>- 동아일보(1988. 8. 2)

 가나안 농군학교 설립자인 김용기(金容基) 장로(1912-1988.8.1)는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며 농촌운동을 해 온 기독교 장로이다. 김 장로는 21세 때인 1933년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 봉안(奉安) 이상촌(理想村)을 세운 이래 지금까지 6개의 이상촌 농장학교를 건설, 농촌지도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농업기술 보급, 자립정신, 개척정신 등을 교육해 왔다.

 해방 직후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을 수행하며 한때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다시 농촌으로 돌아와 1950년 용인군 원삼면 사암리 5만평 위에 이상촌 ‘에덴향(鄕)’을 세우고 농민운동과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954년에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읍 풍산리 황산마을 황무지 1만평 위에 ‘가나안 농장’을 세워 이름대로 거칠어 쓸모없는 땅을 성경에 나오는 약 속의 땅 ‘가나안’처럼 ‘꿀과 젖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농장이 건설된 지 8년만인 1962년 2월에는 가나안 농군학교의 문을 열고 이후 기업체 임직원, 학생, 공무원, 농촌지도자, 종교인, 군인, 언론인 등 31만여 명에게 정신교육과 농사실습을 시켜왔다.

 그의 이러한 공로가 알려지면서 1966년 막사이사이 사회공익부문상, 1973년 제1회 인촌(仁村) 문화상을 비롯, 5백여 차례나 각종 표창, 훈장, 감사패를 받았다.

 김 장로는 평생 동안 넥타이를 매지 않고 근검한 생활로 일관해 왔는데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러 필리핀에 갈 때나 훈장을 받으러 청와대에 들어갈 때도 가나안농군학교 작업복 차림에 고무신을 신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도 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1962년 처음으로 가나안농군학교를 찾아가 둘러본 뒤 가나안 농장에서 힌트를 얻어 훗일 새마을운동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