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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by 언덕에서 2024. 5. 8.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고대 인도의 5천축국을 답사한 여행기로 필사본이며 1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승려 혜초(慧超.704∼787)가 727년(성덕왕 26)에 지은 책이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 중국학자 나옥진(羅玉振)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 각국의 종교와 풍속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때는 벌써 불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대ㆍ소승(大小乘)이 구행(俱行)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서 조사설재(造寺設齋)할 때에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사시(捨施)하는 독신자(篤信者)도 있다고 하였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가봉뇌옥(枷棒牢獄)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가지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혜초의 여행 경로

 

 

 신라 승려 혜초가 지은 「왕오천축국전」의 완질은 남아 있지 않고, 일부분만이 현존한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펠리오(Pelliot,P.)가 중국 돈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하였는데 원래는 3권이었던 듯하나 현존본은 그 약본(略本)이며, 앞뒤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현존본은 동부 인도 기행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곳에 진기한 나체족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쿠시나가라에 대한 견문으로, 이곳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곳이며, 다비장(茶毘場)과 열반사(涅槃寺) 등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한 달 동안 다시 남쪽으로 여행하여 바라나시(Varanasi)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석가모니가 오비구(五比丘)를 위하여 최초로 설법한 곳이라 적었다. 다시 동쪽으로 여행하여 라자그리하에 닿아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참배하고, <법화경(法華經)>의 설법지 영축산을 방문하였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세존이 대각을 이룬 부다가야(Buddhagaya)를 참배하여 대각사(大覺寺)와 보리수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서북쪽으로 길을 찾아 중천축국으로 간다. 이곳에 이른바 사대영탑(四大靈塔)이 있다고 하였으며, 각각을 방문하였고, 또 석가의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도 방문하였다고 한다. 다음 여행지는 남천축국인데 아잔타ㆍ엘로라 등은 방문한 흔적이 없다.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거쳐 북천축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금의 파키스탄 남부 일대와 간다라(Gandhara) 문화 중심지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북 일대를 답사하였다고 적었다.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현재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을 거쳐 대발률(大勃律)ㆍ소발률(小勃律) 등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번에는 거꾸로 간다라지방을 거슬러 내려오면서 스와트(Swat)ㆍ길기트(Gilgit)ㆍ페샤와르(Peshawar) 등지를 방문하였고, 그 북쪽에 있는 오장국(烏長國)ㆍ구위국(拘衛國) 등도 답사하였다. 다시 실크로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바미안에 이른다. 이후 동쪽으로 카시카르를 지나 구주국(龜註國)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가 727년(성덕왕 26) 11월 상순이었으며, 여기서 그의 여행기는 끝난다.

 이 「왕오천축국전」은 약본이기 때문에 인도의 각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관한 서술이 지극히 간략하다. 어떤 곳은 지명이나 나라 이름 등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언어ㆍ풍속ㆍ정치 등 일반적인 언급도 빈약한 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전술한 인도 여행기들은 육로기행과 해로기행인 데 비하여 이 책은 육로와 해로가 같이 언급되고 있다.

 둘째, 전술한 여행기는 6세기와 7세기의 인도 정세를 말해 주는 자료이지만 이 책은 8세기의 사료이다.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튀르크족이나 한족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일반적인 정치 정세 이외에 사회상태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돋보인다.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해지고 있는지, 또 음식ㆍ의상ㆍ습속ㆍ산물ㆍ기후 등도 각 지방마다 기록하고 있다.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 있다는 등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므로 이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국적인 풍취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인도에는 감옥이나 사형제도가 없고, 죄를 지은 이는 벌금으로 다스린다는 기록, 카슈미르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혜초는 당시로 보아 국제적인 승려였음에 틀림없다. 신라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인도를 다녀왔다는 그의 행적은 무척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909년 중국학자 나진옥(羅振玉)에 의하여 <왕오천축국전>임이 확인되었고, 1915년 일본의 다카쿠스(高楠順次郎)에 의하여 그 저자가 신라 출신의 승려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928년 독일학자 푹스(Fuchs,W.)에 의하여 독일어 번역이 나왔고, 1943년 최남선(崔南善)이 이 원문과 해제를 붙임으로써 널리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