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고자료

시인, 독립투사 이육사(李陸史.1904.4.4∼1944.1.16)

by 언덕에서 2012. 6. 30.

 

 

시인, 독립투사 이육사(李陸史.1904.4.4∼1944.1.16)

 

 

 

 

시인. 독립투사.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원촌리(遠村里) 출생. 본명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이육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황(李滉)의 14세손으로, 조부(祖父)인 이중식(李中植)에게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조부가 연 예안(禮安)의 보문의숙(寶文義塾)에서 신문학을 수학했다. 1925년 대구(大邱)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후 일본, 북경(北京) 등지를 갔다가 귀국한 1927년부터 3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고 출옥하여, 1930년 북경(北京)으로 가서 북경대학(北京大學) 사회학과를 마쳤다.

 1933년 귀국하여 최초의 시작품 <황혼(黃昏)>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1933년부터 1941년까지 9년간에 걸쳐 시, 한시(漢詩) 외에도 논문ㆍ번역ㆍ시나리오ㆍ수필 등을 발표했고, 1937년 [자오선9子午線)]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하여 동대문경찰서(東大門警察署) 형사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1944년 옥사(獄死)했다. 그의 유고시집(遺稿詩集)은 1946년 <육사시집>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고. 다시 <청포도>(1964) <광야(曠野)>(1971)라고 제명이 바뀌어 간행되었다.

 이육사는 시작(詩作)활동 못지않게 독립투쟁에도 헌신,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보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悲運)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의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의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를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被檢),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병보석으로 출옥해 친척집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고향 뒷산에 안장되었고, 1968년 안동시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그가 문학활동을 한 때는 문학사적으로 보아 문단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에 많은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문학으로 타락했으나, 그는 끝까지 민족적 신념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저항했다.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시풍을 보이면서도 <절정> <광야> <꽃>에서 보듯 서정을 잃지 않은 저항시를 썼으며, 상징적이면서도 화려한 수법으로 암흑 속에서도 민족의 신념과 의지를 노래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1935년을 전후해서 쓰여졌는데, 이때는 그가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던 때인 만큼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북방의 정조(情調)와 함께 전통적인 민족정서가 작품에 깃들어 있다.

  생전의 유작(遺作) 20여 편은 신석초 등의 문우(文友)들에 의해 1946년 <육사시집>으로 꾸며졌다. 이 중에는 <청포도> <황혼> 등 향토적 정경과 그의 의지를 융합한 서정적인 작품, <광야> <절정>과 같이 강인한 신념과 지조로 일관했던 독립에의 절규를 노래한 시가 있다. 1956년에 재간본(再刊本)을 냈고, 1964년 <청포도>란 이름으로 재중간, 1971년에는 작품 연보에서 밝히지 못한 연대를 밝혀내고, 종전의 시집에 수록되지 않았던 작품을 추가하여 <광야>란 제목의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