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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한로(寒露) / 이상국

by 언덕에서 2009. 10. 12.

 

 

한로(寒露)

                                              이상국

 

 

가을비 끝에 몸이 피라미처럼 투명해진다

 

한 보름 앓고 나서

마당가 물수국 보니

꽃잎들이 눈물 자국 같다

 

날마다 자고 나면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아프니까 좋다

 

헐렁한 옷을 입고

나뭇잎이 쇠는 세상에서 술을 마신다

 

 

 

-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작과비평사 2005)

 

 

 

 

 

 

 

 

 

 

 

 

 

한로(寒露)는 늦가을에서 초겨울 무렵까지의 이슬을 말하는 것이나 절기로는 추분과 상강 사이에 들며 10월 중순경이다. 이 때쯤 되면 푸르던 나뭇잎은 조금씩 변색되어 가고 아침저녁 서늘해지는 바람소리가 온 몸을 스산하게 만든다. 오다 가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용기를 내어서 먼저 인사를 하자.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선선해진다. 그러다가 한번씩 오는 가을비에 기온은 뚝뚝 떨어진다. 시인은 한로(寒露)에는 이슬도 엷은 얼음물 밑 피라미처럼 투명하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름내 푸르던 초록 곁에서 시원하고 소담스럽게 꽃 피어있던 수국 꽃잎이 눈물자국처럼 시들어 버리는 시기인 것이다. 가난한 농촌살이에서는 매일매일이 걱정이고 시름일 것이다. 차가와 지는 계절, 곧 올 겨울을 어찌 날까 염려되지만 그러한 걱정은 몸이 아파서 그 와중에 잊어버린다. 곧 이어 겨울이 혼자 쓸쓸히 우리의 팔짱께에 와서 조용히 바람 소리 내고 손바닥에 흘러내릴 것이다.

 

 큼직하지만 적당히 낡고 편안한 옷을 입고 나뭇잎도 함께 지내는 자연 속에서 술을 마시며 시름을 덜어보는 장면은 한 폭의 정갈한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그런 게 인생이다. 세상은 마음먹기 나름이 아닌가. 몸이 피라미처럼 투명해지는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나 자신 좋은 글을 쓸 수 없지만 마음이나마 투명하게 비워 이상국 시인(1946~ )의 맑디 맑은 시를 음미하는 것도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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