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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즐거운 편지 / 황동규

by 언덕에서 2009. 9. 22.

 

 

 

 

 

 

 

 

 

즐거운 편지

 

                                                                                                                                 황동규

 

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시집 <어떤 개인 날> (중앙문화 1961) 

 

 

 

 

 

  

 

 

   

 

 너무나도 유명한 이 시는 황동규 시인(1938 ~ )의 첫 시집 <어떤 개인 날> (1961)에 수록되어 있다. 황동규의 초기 작품인 이 시는 작가가 고등학교 3학년인 18세 때 연상의 여대생을 사모하는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연애시라고 한다. 지금도 널리 애송된다.

 2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로 변함없는 기다림의 즐거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는 것이지만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언젠가는 끝나고 말 것이다. 따라서 헤어짐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의 영원히 변치 않는 기다림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시는 사랑과 기다림을 주된 제재로 삼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늘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다림을 통해 극복해나가겠다는 사랑의 굳은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인한 젊은 날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때 묻지 않은 시각과 감성이 풍부한 서정적인 어조로 적어 내려간 낭만적ㆍ우수적 성격을 띤 서정시이다. 작가 개인의 서정적 관심을 바탕으로 주관적인 감정표현을 이미지적인 표현을 활용하여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에 실린 대부분의 연가와 마찬가지로 서구적 인식의 로맨티시즘에 바탕을 둔 투명한 정감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작가의 초기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연애시이다. 이 시의 '내 그대를 생각함은' 이후로 오는 것은 실은 다 여백이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편지를 쓰게 하는 능동적인 여백이다. 나의 짝사랑의 입장에선 사소한 것일 수도 있음까지 헤아리는 순수함이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괴로움 속을 헤매 일 때'가 온다면 그때는 화자가 그를 지킬 것이라고 다짐하는 결연한 열정이 아름답다. 자신의 사랑을 '사소함'이라 말하는 조숙함은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얻지 못할 자세일 것이다.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 기다림의 자세를 노래함으로써 전형화되어온 전통적 연애시의 계보와는 차원이 다른 또다른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한국 영화 <편지> (1997)와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등은 이 시에서 주된 모티프를 얻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e-mail을 보내고 휴대폰(mobile)을 사용하는 관계로 만년필로 편지를 쓰고, 풀로 봉투와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가고 하는 일이 없어졌다. 누군가로부터 하얀 편지지에 만년필로 곱게 적어 내려간 편지를 받아보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